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 (문단 편집) === 배경 === 빌뉴스는 예로부터 전통적인 리투아니아의 수도였으며 그 주변 지역은 [[리투아니아 대공국]] 시절부터 리투아니아의 땅이었다. 하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 시절과 [[폴란드 분할|폴란드-리투아니아의 분할]] 후 러시아의 지배를 거치며 이 지역은 폴란드인과 유대인들의 땅이 되었다. 1916년 독일 인구조사에서 빌뉴스 시의 인구 구성은 폴란드계와 유대계가 각각 50.2%와 43.5%로 대다수를 점하고 리투아니아인은 2.6%에 불과하였다. 빌뉴스를 제외한 중앙리투아니아 지역의 경우 89.8%가 폴란드계였으며 리투아니아계는 4.3%에 불과했다. 하지만 위 조사에서 감안해야할 점은 1916년 인구조사를 포함한 당대 인구조사 상당수는 인구의 언어에 따라 분류했다는 점이다. 이 당시까지 [[폴란드어]]는 민족 정체성과 관계없이 동유럽 지식인층의 [[링구아 프랑카]]였고 이것은 과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절부터 이어지던 것이었는데, 이러한 까닭으로 [[폴란드어]] 화자이되 [[리투아니아인]] 정체성을 가진 이들도 해당 조사에서는 폴란드계로 분류되었던 것. 이는 리투아니아 민족주의자들의 해당 인구조사에 대한 유효한 반박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예일 대학교]] 교수이자 역사학자 티모시 스나이더는 관점에 따라 (언어 분류에 따른) 폴란드계는 빌뉴스 지역의 다수민족일 수도 있지만 민족분류 그 자체가 아닐 수도 있다고 평했고 당대 폴란드어를 화자로 동화되는 것은 폴란드인이라는 민족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단순히 명망있는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원문: Depending on one's point of view, Polish was either the dominant nationality in and around Wilno or not a nationality at all: assimilation to Polish language was regarded not so much as joining a distinct national society as joining respectable society] 더군다나 빌뉴스 지역의 유대인들 대다수는 폴란드-리투아니아 분쟁에 별 의견이 없었으나 일부[* 주로 좌익 계열] 유대인들은 훨신 크고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폴란드보다 리투아니아를 선호했다. 이러한 민족분쟁에 따라 1919년 [[러시아 제국|러시아]]와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오헝제국]]이 몰락하고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독립하자 갈등이 빚어지게 된다. 우선 독일 제국이 [[소비에트 러시아]]와 맺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서 빌뉴스 지역은 신생 리투아니아에 귀속되었지만 이 당시 폴란드는 이런 조약 따위를 준수할 국가가 아니었다. 123년간의 지배 이후 독립한 폴란드는 국경이 분명히 정의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당시 폴란드 정부는 확장주의적인 성격이 강했다. 당시 폴란드 제2공화국은 라트비아, 루마니아를 제외한 나머지 국경을 맞대고 있던 나라들과 모두 국경분쟁을 겪었고, 독립 직후 영토분쟁으로 전쟁만 3번 치른 나라였으며, 독립 직후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재건하자는 주장(...)도 정식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호전적인 나라였다. 다만 아무 근거없이 폴란드가 혼자서 전쟁광에 확장주의적이고 볼 순 없고, 기본적으로 저렇게 폴란드계가 절대 다수이며 이웃 다른 신생국들과 클레임 분쟁이 걸린 르부프, 빌노 같은 지방도 무슨 애초에 그럴만한 강력한 중앙 권력도 없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시절에 폴란드계가 무슨 인종청소를 해서 그리 된 것도 아니고, 원래는 리투아니아어도 쓰고 리투아니아적 정체성이 강했던 현지 토착 엘리트들이 수백년간 천천히 나머지 연방 전체의 문화적, 정치적 주류 언어였던 폴란드어로부터 시작해서 점차적으로 동화되면서 20세기 시점에선 '폴란드인'이 되어버렸던 것이라 아예 폴란드만 멋대로 남의 나라 침략하고 다녔다고 봐선 안된다. 폴란드가 계승한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워낙 중동부 유럽의 거대 국가였던 만큼 폴란드인들의 역사적 지분도 그만큼 커서 분쟁이 많았던 것이고, 비슷한 류의 전형적인 '''근현대적 민족관념 따윈 존재하지도 않았던 중세, 근세 왕국들의 역사를 맘대로 민족주의적으로 해석해 우리 민족만 살아야 할 우리 땅이다'''라고 주장하며 비슷한 처지의 이웃 신생국들과 분쟁이 끊임없었던 건 비단 폴란드 뿐만 아니라 헝가리-루마니아 간 [[트란실바니아|트란실바니아 분쟁]]부터 남쪽으론 이탈리아-유고슬라비아 간 피우메/리예카 분쟁,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터키-그리스간 영토와 민족 분쟁]]까지 [[전간기|베르사유 체제]] 전체의 문제였다. 이 와중에 폴란드는 상술한 폴란드-리투아니아라는 전근대적 전신 자체의 비중이 워낙 컸고, 19세기 초반부터 유럽 전역의 낭만주의적 민족주의 혁명운동을 주도했던지라 당장 신생 폴란드의 군사지도자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본인부터 그랬고, 정치적 정체성은 폴란드인이지만 원래 집안의 기원은 리투아니아/중세 루스/독일계/유대인으로서 정체성도 자각하며 협소한 의미에서 베르사유 체제적 폴란드 민족국가가 아니라, 지정학적으로 독일과 소련 사이 중간세력으로 중동부 유럽을 다시 묶을 수 있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자체의 재건을 주장하는 세력의 지분이 강력했다. 신생 폴란드 정계 내부적으로 보면 오히려 이들의 주장에 정면 반대하며 협소한 의미에서의 폴란드인들만 살며 왠만한 민족분쟁 걸린 국경 지방은 떼줘도 된다는 로만 드모프스키가 이끄는 민족민주주의 세력이 이들과 강력하게 대립하고, 사회 내적으론 대외적으론 이렇게 확장주의적인 연방재건주의자들이 오히려 내부 사회정책상으론 적어도 일관성은 있게 폴란드 내에 사는 우크라이나인, 유대인 같은 소수민족에게 관용과 자치 보장을 주장하는 등 나름 진보적인 면이 있었다. 신생 폴란드 내부 정치적 대립이 이러하니 피우스트스키가 이끄는 주로 군부에 집중되어 있었던 연방재건파 다민족주의자들에게 있어 대외적으로 다른 신생국들과 전쟁을 하여 '폴란드인들의 땅'을 '회복'하는건 필수적인 정치적 모험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중세, 근세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폴리투 연방이 어쨌든간에 본인들은 이제 전혀 다른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라트비아, 슬로바키아인 등으로 독자적 정체성을 가지게 된 다른 민족들 입장에선 이런 폴란드 내부의 팽창주의적 다민족주의 vs 협소적 단일민족주의 논쟁 따윈 알 바 아니었고, 현지 폴란드인들의 존재와 과거 폴리투 연방 시절의 역사를 빌미로 쳐들어오는 폴란드는 단순한 침략자일뿐. 이런 식으로 200년간 베를린, 빈,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전제 군주들이 다스리기만 했던 나라와 민족들이 새로 신생 민족국가가 되면서 서로 배타적인 역사에 기반한 영토 주장을 타협할 여지도, 이걸 중재할 초월적인 외부 권력도 없으니 결국 베르사유 체제 아래 중동부 유럽의 민족영토분쟁은 끝도 없이 혼란을 야기하다 결국 2차대전이라는 파국으로 치달았던 것이다. 어쨌든 당연히 폴란드계가 다수를 점하고 있던 빌뉴스 지역을 리투아니아에 넘어가도록 둘 생각은 없었으며 이는 폴란드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재건을 부르짖으며 리투아니아와의 전쟁으로 번지게 된다. 하지만 [[소비에트-폴란드 전쟁]]과 이로 인한 자금 부족 및 경제적 압박, 그리고 국제사회의 따가운 시선(그리고 이어지는 [[국제연맹]]의 중재)으로 인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쟁]]은 폴란드가 빌뉴스를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별 소득없이 [[https://en.wikipedia.org/wiki/Suwa%C5%82ki_Agreement|수바우키 협정]]에서 국경조정만으로 끝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